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독일어]]에 미친 영향력 == >'''루터의 독일어는 그 순수함과 엄청난 영향력으로 인해 현대 독일어의 기초를 제공했다.''' >---- > [[그림 형제|야코프 그림]][* [[그림 동화]]로 유명한 [[그림 형제]]중 형이며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다. 언어학자로서 근대 언어학을 개척하였다. 언어학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실시하여 음운 변이에 관한 '그림의 법칙'을 수립하여 이 방면에서 획기적인 공적을 올렸다. 또 '독일 문법'에 의해 게르만 어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Jakob Grimm), 독일의 언어학자, 동화 수집가 >'''그 어떤 것도 마르틴 루터의 위대함에 반대 할 수 없다! 그는 성서 번역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독일어를 제대로 만들었다. 이 언어를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와 [[프리드리히 니체|니체]]가 완성했다.''' >---- > [[토마스 만]],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터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521년 12월 21일, [[성경#s-6|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단했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 번역을 시작한 지 11주 만에 220쪽에 달하는 신약성경을 모두 번역했다. 그는 1522년 3월 번역한 성경 원고를 몸에 지닌 채 바르트부르크를 떠났다. 그 후 몇 달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 1522년 9월, 3천부의 신약성경을 인쇄했으나 금방 모두 판매되었으며, 엄청난 수요 때문에 3개월 후 다시 인쇄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루터의 성경 번역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22년부터 1546년까지 비텐베르크 (wittenberg)에서만 신구약성경이 10판 인쇄되었으며, 신약 성경만은 따로 80판이 인쇄되었다. 같은 기간에 독일 전역에서는 260판의 성경이 인쇄되었으며 1712년부터 1883년까지 할레(Halle) 지역에 있는 성경 인쇄소에서만 거의 580만 부의 성경이 인쇄되었다.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독일의 거의 모든 계층에서 성경을 읽게 된 것이다. 그러자 루터는 구약성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모두 배운 루터였지만, 혼자서 성경을 번역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번역가는 절대로 혼자 일해서는 안 된다. 혼자 번역하면 적절한 최상의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루터는 '산헤드린'이라고 명명한 번역위원회를 꾸렸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번역위원회라는 개념은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 요하네스 부겐하겐(John Bugenhagen), 카스파르 크루시거(Caspar Cruciger) 같은 학자들이 루터가 만든 번역위원회에 합류해 선례를 만든 덕분이라고 보면 된다. 이 위원회의 학문성에 필적할 만한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루터는 번역의 최고 책임을 맡았다. 그는 산헤드린에 동기를 부여하고 이들을 이끌며 번역을 진행했는데,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는 학문적이거나 문어체가 아니라 독일 말을 생생하게 살린 번역을 원했다. 어떤 단어나 구절이든 옮겨 적기 전에는 반드시 루터의 눈이 아닌 귀부터 통과해야 했다. 들었을 때 거슬리지 않고 잘 이해돼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일어 성경이 가진 가장 최고의 자산인데, 이것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문자 하나하나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하려 했던 루터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어로 치면 직역 위주의 KJV, ESV, RSV, NRSV보다는 의역과 직역을 절충한 NIV처럼 번역하려고 했던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어의 표현을 모국어로 온전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절한 번역 방법론은 원서의 어법에 따라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을 고르는 것이다.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외국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우리말의 표현이 되게 해야 한다. 나는 시장 통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모세를 소개하면서 누구도 그를 유대인으로 보지 않도록, 꼭 독일인처럼 만들려고 한다. 번역자들은 기본 언어로 궁정 언어를 채택했지만, 제국의 갖가지 방언들에서 최상의 표현을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루터는 철저한 완벽주의자로, 꼭 맞는 단어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각기 다른 방언을 쓰는 노인들과 아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제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푸주한을 데려다 양을 도살해서 그 내장을 연구하기까지 했다. '새 예루살렘'에 나오는 '보석'을 번역할 때는 도대체 그것이 어떤 돌인지 알지 못해 고민이 되자, 선제후의 수집품 중에서 그것과 비슷한 돌을 빌려와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루터는 히브리어 원문을 최대한 독일어답게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없이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우리는 선지서를 독일어로 옮기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고 그는 기록했다. 오, 주여. 이 저자(선지자/편주)들이 독일어로 말하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요. 이들은 그럴 마음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들은 히브리어를 포기하고 야만적인 우리 독일어를 따라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지빠귀로 하여금 아름다운 선율을 거두고 경멸해 마지않는 뻐꾸기의 재미없는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욥기]] 전편에 흐르는 격한 감정을 표현한 말들을 번역하느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심지어 욥은 친구들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보다도 우리가 욥기를 번역하려드는 게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의 번역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재 위에 드러눕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산헤드린은 신속하게 그렇지만 정확하게,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변증적인 어조로 번역을 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태어난 독일어 성경은 이보다 나중에 나온 <킹 제임스 성경>보다도 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다. 또한 이 성경은 읽을 때 뿐 아니라 낭독할 때도 자연스럽게 들리기 때문에, 운율과 가독성에서 탁월해 지금까지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루터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독일에는 15개의 독일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으므로, 성경의 독일어 번역 자체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단순히 단어별로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쓰는 말, 의미가 정확한 말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관용적인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로써 [[독일어]] 표현이 더욱 풍부해졌다. 또한 시적인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를 통해 독일어가 아름다워지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아베 마리아]], 그라시아 플레나 (Ave Maria, gratia plena)는 말 그대로 번역하면 마리아는 은혜가 꽉 찼더라.이다. 그러나 당시 평민들은 '꽉 차다'라는 말을 '배가 꽉 차다', '맥주통이 꽉 차다'라는 뜻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루터는 이 말을 마리아는 은혜로 충만하더라.로 번역했다. 이러한 루터의 작업으로 인해 독일어 어휘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한 예로 독일어로 '직업'을 의미하는 '베루프(beruf)'는 루터 당시에는 목사들에게만 사용되는 어휘였다. 그러나 루터는 돈을 받고 일하는 모든 직종에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독일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가 살아있을 당시 독일에는 20개 정도의 지역어가 존재했다. 이들은 크게 북독일어, 남독일어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루터는 두 지역의 경계인 비텐베르크에 살았기 때문에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알았다. 합스부르크-룩셈부르크 제국의 황제들이 궁정에서 평소 사용하던 말이 이런 독일어였다. 루터는 두 지역 언어의 요소를 모두 지닌 단어로 성경을 번역하고자 했다. 또한 남독일에서 발간된 루터 번역본에서는 남독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북독일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를 남독일에서는 '트레넨 (Tränen)'[* 현대독일어에선 Träne이다.]이라고 했고 북독일에서는 '체레 (Zähre)'[* 영어의 tear와 동일 어원. 원래 남독일에서 쓰이는 고지독일어에서 유래됐지만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당시에는, 이미 북독일의 중세 저지독일어에 흡수돼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당시의 철자는 zâhē였다.]라고 했는데 이 두 단어를 서로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 피지배층, 남녀노소 등 다양한 세대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루터 성경 번역본은 독일어의 통일에도 기여를 했다. 당시 독일은 잉글랜드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와는 달리 지방 분권적 제후국이었던 탓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없었고, 독일 전역을 아우르는 집권자나 집권 세력도 없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 번역본의 출현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독일인들은 통일된 언어로 말하게 되면서 비로소 연대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쓰인 [[독일어]]가 모든 [[독일인]]의 언어가 되기까지는 약 3~4백 년이 걸린 것으로 보고 있다. 루터 성경은 독일에서 5가정마다 1권씩 비치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라서,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동네의 공터에 모여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어 주는 성경을 들었다. 이에 루터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도시의 시장이나 지배층에게 학교를 세워 달라고 했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오랫동안 독일 내 개신교 지역 학교에서 유일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목사들은 설교에서 루터 성경본을 인용하였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하인리히 하이네]] 등 루터의 독일어를 칭송한 독일 작가들은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서 루터가 쓴 독일어는 비로소 일반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루터는 1534년 성경 번역본에서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 시작했다.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은 17세기 들어 다른 유럽어에서는 사라졌지만 독일어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다(커피-coffee(영)-café(프/에)-Kaffee(독)) 성경이 가진 보편성이 호소력을 가진 셈이었고, 독일어의 범위 전체를 온전히 포용해 결국 현대 독일어를 형성하는 언어적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독일 문학과 공연 예술의 형식적 재건에도 도움이 됐다. 루터는 독일사뿐 아니라 독일어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존재였고 루터는 독일어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독일어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언어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몇몇은 루터역 성경에 대해 특히 [[가톨릭]]계나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루터 개인의 취향에 의해 정확성이 훼손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28절에는 "믿음"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루터가 삽입하여 "오직 믿음"으로 번역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루터의 관점으로든 가톨릭의 관점으로든 동일하다고 보지만, '원문 그대로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오직'을 추가한다고 민중의 가독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